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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달팽이에서 찾은 기억력 좋아지는 법?

시험 문제지를 받아 든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분명히 시험 치기 전에 다 공부하고 읽은 것인데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망각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시험 마치고 책을 들추면 어떤 단어 하나가 눈에 띈다. 그 순간, '아, 맞다' 하면서 관련 내용이 줄줄이 떠오른다. 망각된 것이 아니라 인출에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보거나 들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기억해 내는 것일까?

서울대 자연대 생명과학부 신경생물학연구실 강봉균 교수팀은 바다달팽이가 특정한 자극을 경험할 때 ‘ApLLP’라는 새 단백질이 신경세포에서 증가하며, 이후 이 단백질의 역할에 따라 새로운 기억 형성이 촉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간의 뇌가 약 1천 억 개의 뉴런(신경세포)으로 이뤄진 반면, 바다달팽이는 약 2만 개 정도의 신경세포로 이뤄진, 간단한 신경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경생물학자들은 신경세포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비교적 쉽게 관찰할 수 있는 바다달팽이를 연구해 얻은 결과를 다른 고등동물의 두뇌를 연구하는 데 응용하고 있다. 미국 콜럼비아 대학의 캔델(Eric Kandel) 박사 역시 바다 달팽이인 군소(Aplysia)를 재료로 학습과 기억의 세포 메커니즘을 규명해 지난 2000년 노벨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와 관련 강봉균 교수팀도 사람에게 바다 달팽이와 유사한 단백질들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런 단백질의 양을 조절하면 기억 형성 및 저장의 매커니즘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기억에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있다. 사람들은 24시간이 지나면 들었던 것의 80%를 잊어버린다고 한다. 이것은 단기기억에 해당된다. 그래서 복습이 필요하다. 반복적 경험이나 학습을 통해 잊어버리지 않고 평생 기억하는 것은 장기기억에 해당된다. 어렸을 때 외운 구구단을 나이가 들어도 외울 수 있는 것은 구구단 공식이 장기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다달팽이에서도 마찬가지로 단기기억은 1시간 이내, 장기기억은 24시간에서 1개월 이상 유지된다.

뇌는 단기적으로 기억한 것 중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고 꼭 필요한 것만 장기기억으로 저장한다. 장기기억은 단기기억과 비교해 기억의 지속 시간 외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뇌세포와 분자 수준으로 내려가 보면 두 종류의 기억은 완전히 딴판이다. 단기기억 때는 뇌세포와 뇌세포 사이에 새로운 회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단지 뇌세포 회로의 말단에서 신경전달물질이 좀더 많이 나와 일시적인 잔상으로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바뀔 때에는 뇌세포에서 회로를 만드는 ‘유전자의 스위치’가 켜져 새로운 신경 회로망이 생긴다.

강봉균 교수팀은 장기기억에 해당하는 이 ‘기억 유전자의 스위치’가 `C/EBP' 단백질이라는 사실을 이미 밝힌 바 있다. 단백질 중 특히 장기기억의 형성에 중요하다고 알려진 게 `CREB'과 `C/EBP'라는 이름의 단백질인데, 그 중에서도 `C/EBP'는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꿀 수 있는 분자 스위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바다달팽이인 `군소'의 꼬리에 전기 자극을 가하면 가할수록 새로운 단백질 `ApLLP' 의 농도가 학습 전 특정 경험에 따라 계속 높은 상태가 되고, 이 같은 증가가 `C/EBP' 단백질의 양을 증가시킨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ApLLP’에 의한 ‘C/EBP’의 증가는 시냅스(신경세포들 사이의 신호 전달이 일어나는 부위)에서 신호 전달 기능을 강화시켜 장기기억이 쉽게 형성될 수 있도록 한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C/EBP' 단백질의 증가가 가져다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C/EBP’ 단백질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기억을 촉진하지만 다른 하나는 기억에 제동 장치 역할을 한다. 기억을 촉진하는 `C/EBP’ 단백질과 기억을 삭제하는 `C/EBP’ 단백질은 보통 때에는 균형을 이루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면 기억 촉진 단백질이 더 강해져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꾼다. 반대의 경우엔 일시 저장된 단기기억을 지워 버린다.
`C/EBP’ 단백질의 존재는 머리를 쓰면 쓸수록 영리해진다는 것을 분자 수준에서 증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경세포에 자극을 주지 않으면 능력이 떨어진다. 어린이를 아무런 자극을 주지 않고 키우면 뇌가 수축되는 것이 바로 그런 현상이다. 새로운 회로가 생기면 그 회로가 몇 시간에서 몇 주까지도 지속돼 기억이 장기간 저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뇌는 쓰지 않는 회로를 자꾸 없앤다. 앞으로 `C/EBP’ 단백질의 양을 인위적으로 조절하여 장기기억의 형성이나 저장 능력을 조절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더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강봉균 교수팀의 연구는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반복 학습을 통해 이 회로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글 : 김형자 –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과학기술정보 포털사이트 www.yeskist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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